현재 나의 세계관

나는 요즘 이 질문을 자주 한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 정말 맞는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의 세계관이 내가 살아온 경험과 환경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 그것이 전부일 리 없다는 생각.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고, 나는 아직 그 일부만 보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금의 세계관을 부수는 건 — 쉽지 않다.
현재 나의 세계관은 편안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세계관이란 쉽게 말하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다.
이 렌즈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다. 자라온 환경, 겪어온 실패와 성공, 주변 사람들의 말, 읽어온 책들. 그것들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된다.
그런데 이 렌즈는 편안하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면 — 에너지가 덜 든다. 예측이 가능하다. 낯설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 렌즈를 고집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기존 세계관에 맞게 해석하고, 맞지 않으면 무시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확증 편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완성형 인간이 아니라 — 진행형 인간이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어제의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오늘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흔들리는 게 아니라 — 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진행을 멈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세계관은 더 단단해진다. 단단함이 지혜가 될 수도 있지만 — 단단함이 벽이 될 수도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는 벽.
진행형으로 산다는 건 — 그 벽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중세의 항해자들
1400년대, 유럽의 항해자들은 거대한 선택 앞에 섰다.
당시 세계관은 명확했다. 지중해가 세상의 중심이고, 그 너머 망망대해는 괴물이 사는 곳이거나 세상의 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았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달랐다.
저 바다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믿어온 세계관을 — 스스로 부수는 행위였다. 지도에 없는 곳으로 배를 모는 것.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바다로 나아가는 것.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 가보는 것.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항해 기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세계관을 부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 그 용기가 더욱 절실하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어쩌면 중세 항해자의 시대보다 더 빠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다.
10년 전의 상식이 오늘은 낡은 것이 되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은 오답이 된다. AI가 세상을 다시 쓰고 있고,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고, 관계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 이 속도 안에서 기존 세계관을 붙들고 있는 것은 — 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도전자의 마인드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도에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세계관을 향해 배를 모는 것.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용기가 있는가
세계관을 부순다는 건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아 — 더 넓은 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어제의 세계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면, 오늘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할 때가 그랬다.
나는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을 부수고 신발을 신었을 때 — 나는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세계관을 부수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냥 — 지금과 다른 가능성을 한 번쯤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의 망망대해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미라클 세컨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