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ing the Giants

문득 우리 애들이 꼬맹이였을 때 그러니까 15-20년 전에 보여준 영화 중 하나가 생각이 났다. 그 영화의 이야기가 내게 지금 바로 지금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눈을 감는 것이 더 멀리 가게 한다
영화 한 장면이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다.
2006년 크리스천 스포츠 드라마 <페이싱 더 자이언츠>의 한 장면이다.
코치는 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 Brock에게 제안한다. 동료를 등에 업고 Death Crawl — 무릎을 들고 두 손과 두 발로 기어가는 훈련 — 을 50야드 해보라고. 그런데 출발 직전, 코치는 Brock의 눈을 가린다.
눈을 가린 채, 동료를 등에 업고, 기어간다.
코치가 눈을 가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목표 거리를 보지 못하게 해서,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리를 알면 인간은 거기서 멈춘다. 아직 멀었다는 걸 알면 포기한다. 그래서 코치는 그 정보를 차단했다.
Brock은 눈을 가린 채 코치의 격려 속에 계속 기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쓰러졌을 때, 눈가리개를 벗겨내자 그가 기어온 거리가 보였다.
100야드 — 풋볼 필드 전체의 길이였다.
50야드를 목표로 했는데, 눈을 감았기 때문에 100야드를 간 것이다.
알기 때문에 멈춘다
이 장면이 나한테 오래 남은 이유가 있다.
나는 너무 많이 알려고 한다. 시작하기 전에 결과를 먼저 알고 싶어한다. 이게 성공할까, 이 블로그가 수익이 될까, 이 달리기가 내 몸을 바꿀 수 있을까. 미리 다 계산하고 싶어한다.
근데 그 계산이 정확할수록, 나는 더 자주 멈췄다.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수익. 그걸 미리 알았다면 시작했을까. 만성피로로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풀마라톤을 완주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믿었을까. 어떤 지식은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무한대의 두려움 속에 가두어 버린다.
모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눈을 감고 달린다
달리면서 비슷한 걸 느낀다.
20km를 달릴 때, 처음부터 15km 지점의 고통을 알고 있다면 출발하기 싫어진다. 근데 그냥 달리다 보면, 어느새 그 지점을 지나 있다. 몸이 가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Brock이 눈을 가리고 기어갔듯, 나는 결과를 모른 채 달린다. 이 달리기가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모른다. 이 블로그가 언제 의미 있는 숫자를 만들지 모른다. 하고 싶었던 유튜브를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괜찮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모르기 때문에 계속 갈 수 있다.
투지는 어디서 오는가
Brock이 100야드를 갈 수 있었던 건 체력 때문이 아니었다.
코치는 그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법, 자신을 믿는 법,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힘을 찾는 법을 가르쳤다. 눈을 가린 것은 정보를 차단한 게 아니라, 한계를 차단한 것이었다.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네 머리가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나도 그렇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블로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달리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직 멈출 이유가 없다.
때로는 눈을 감는 것이 나를 더 멀리 가게 한다.
모르는 것이 용기가 된다. 두려움을 지식이 만들어낸다면, 무지는 때로 가장 강한 투지의 연료가 된다.
그래서 오늘도 눈을 감고 간다
나는 아직 이룬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생각을 잠깐 내려놓으려 한다. 50야드가 목표였는데 100야드를 간 Brock처럼, 내가 설정한 목표가 실제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미리 계산한 한계가, 진짜 한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간다.
결과를 다 알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다 알면서도 가는 사람도 없다. 그냥 오늘 한 발을 내딛고, 내일 또 한 발을 내딛는 것. 그게 전부다.
Brock은 눈을 가렸기 때문에 100야드를 갔다.
나는 끝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 멈추지 않는다.


